
다른 신을 믿는 이웃
— 유럽은 유대인을 보호하다가도 내쫓았고, 이슬람권은 세금을 받고 보호했으며, 중국은 황제의 뜻에 따라 받아들이고 또 거두었다 —
How did medieval societies treat neighbours who worshipped another god? In Latin Christendom the answer swung between protection and expulsion. After the First Crusade, in which more than five thousand Jews were killed in 1096, Pope Callixtus II issued the bull Sicut Judaeis around 1120, forbidding forced conversion and violence against Jews. Yet in 1215 the Fourth Lateran Council required Jews and Muslims to wear distinctive clothing, England expelled its Jews in 1290, and Spain's Alhambra Decree of 1492 drove out tens of thousands more. In the Islamic world, Jews and Christians — the “People of the Book” — became dhimmis, “protected people”: they paid the jizya tax and in return kept their lives, property, places of worship and their own courts, though they lived under restrictions and could not hold the highest offices. A Jewish physician, Hasdai ibn Shaprut, served as the Caliph of Córdoba's trusted diplomat in the tenth century; yet in Cairo the caliph al-Hakim ordered churches and synagogues demolished around 1012, before his successor let them be rebuilt. In China, foreign faiths depended on the emperor's will. The Tang emperor Taizong welcomed Syriac Christian missionaries in 635, and a stele of 781 still records their history; but in 845 Emperor Wuzong destroyed more than 4,600 Buddhist monasteries and forced over 3,000 Christian and Zoroastrian clergy back to lay life. Persecution, protection and permission: three ways of living with difference — none of them yet equality.
유럽은 교황이 유대인 보호를 선언하면서도 표지를 달게 하고 끝내 추방했고, 이슬람권은 기독교인·유대인을 세금(지즈야)을 내는 "보호받는 이웃(딤미)"으로 받아들였으며, 중국은 황제의 허락으로 낯선 종교를 맞이했다가 황제의 명령으로 거두기도 했습니다 — 셋 다 "함께 사는 법"을 찾았지만, 아직 "평등"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1. 시대와 배경
⑤ 사회와 신분 구간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56편이 "사람을 소유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면, 이번에는 "나와 다른 신을 믿는 이웃과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묻습니다. 중세의 도시와 항구에는 언제나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살았습니다. 상인, 의사, 학자, 장인으로 꼭 필요한 이웃이었지만, 동시에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세 문명은 이 이웃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그 받아들임이 흔들리는 순간도 서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보호는 늘 조건부였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유대인과 무슬림에게 겉으로 구별되는 옷이나 표지를 달게 했습니다. 잉글랜드는 무거운 세금으로 유대인 공동체의 재산을 짜낸 뒤, 1290년 에드워드 1세의 추방령으로 그들을 모두 내보냈고, 1656년에야 다시 정착을 허락했습니다. 1492년 스페인의 알함브라 칙령은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에게 넉 달 안에 떠나라고 명령해, 4만~10만 명이 고향을 등져야 했습니다.
그 사이에도 함께 산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톨레도에는 기독교 왕국 아래에서 무슬림 장인들이 유대인을 위해 지은 회당(1180~1205년 무렵)이 남아 있어 "세 문화가 협력한 상징"으로 불립니다. 다만 이 건물도 1411년 무렵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이 제도 안에서 뛰어난 딤미들은 중요한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10세기 코르도바의 유대인 의사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는 칼리프 압드 알라흐만 3세의 주치의이자 믿음직한 조언자로, 사실상 외교를 책임지며 각국 사절을 맞았고, 그리스 약학서 『약물지』의 아랍어 번역을 이끌었습니다. 9~10세기 바그다드 아바스 궁정에서는 유대인 은행가들이 큰 영향력을 가졌고, 기독교인과 유대인 전문가들이 재정과 세금 업무를 맡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딤미는 "보호받는" 사람이지 "같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우마르 협약"은 새 예배당을 짓거나 고치는 것을 제한했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 옷차림 규정이나 말·낙타를 타지 못하게 하는 제약도 있었으며, 나라의 최고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습니다. 보호가 통치자의 뜻에 달려 있었다는 점도 분명했습니다. 1012년 무렵 카이로의 칼리프 알하킴은 교회와 유대교 회당을 허물라고 명령했고, 그다음 칼리프 때인 1025~1040년에야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지즈야가 폐지되고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평등이 법으로 확인된 것은 1856년 오스만 제국의 개혁 칙령에서였습니다.
그러나 845년, 위구르와의 전쟁으로 나라 살림이 바닥나자 당 무종은 세금을 내지 않던 사찰의 재산에 손을 댔습니다. 이른바 "회창폐불"로 사찰 4,600여 곳과 작은 암자 4만여 곳이 헐렸고, 승려와 비구니 26만 500명이 세금을 내는 백성으로 돌아갔습니다. 외래 종교도 함께 휩쓸려,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 성직자 3,000여 명이 환속당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는 이때 중국에서 거의 사라졌고, 기독교도 원나라 때까지 긴 쇠퇴에 들어갔습니다. 경교비가 땅에 묻힌 것도 이 무렵으로 보이며, 1620년대에야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무종이 이듬해인 846년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은 황제가 사면령을 내려 박해는 끝났습니다.
한편 송나라 시대에는 카이펑에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 잡았습니다. 1489년의 비문은 1163년에 회당이 세워졌다고 전하며, 이웃 중국인들은 고기의 힘줄을 빼는 그들의 음식 계율을 보고 "도근교(挑筋敎)"라 불렀습니다. 이 공동체는 박해보다 오랜 세월의 결혼과 동화 속에서 조금씩 중국 사회에 녹아들었습니다.
📊 세 문명 한눈에 비교하기 — 다른 신앙의 이웃은 어떻게 살았나
| 구분 | 유럽 | 이슬람권 | 중국 |
|---|---|---|---|
| 대표적인 이웃 | 유대인 | 유대인·기독교인(뒤에 조로아스터교도 등) | 경교(기독교)·조로아스터교·마니교·유대인 |
| 받아들인 근거 | 교황 교서(시쿠트 유다에이스) | 딤미 계약 — 지즈야를 내면 보호 | 황제의 허락(당 태종, 635) |
| 누린 것 | 개종 강요·폭력 금지(원칙) | 생명·재산·신앙 보호, 자치 법정, 군 복무 면제 | 사원 건립과 포교 |
| 제약 | 구별 표지(1215), 무거운 세금 | 예배당 신축 제한, 최고위직 불가 | 황제의 판단에 따라 언제든 금지 |
| 흔들린 순간 | 1096 학살, 1290·1492 추방 | 1012년 무렵 알하킴의 예배당 파괴 | 845 회창폐불 |
| 공통점 | 셋 다 다른 신앙의 이웃을 받아들일 길을 만들었지만, 그 길은 "권리"가 아니라 권력자가 베푸는 "보호"나 "허락"이었기에 언제든 거두어질 수 있었다 | ||
허락 — "있어도 좋다." 당 태종이 경교를 받아들인 것처럼, 권력자가 문을 열어 줍니다. 하지만 같은 권력이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845년).
보호 — "세금을 내면 지켜 주겠다." 딤미 제도처럼 약속과 대가가 정해져 있어 허락보다 안정적입니다. 그러나 보호받는 사람은 보호하는 사람과 같은 자리에 서지 못하고, 통치자가 약속을 어기면(1012년 무렵) 기댈 곳이 없습니다.
권리 — "누구나 같다." 신앙과 관계없이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단계는 중세 어디에서도 완성되지 못했고, 1856년 오스만 개혁 칙령이나 근대 헌법들에 와서야 조금씩 자리 잡았습니다.
허락과 보호는 주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사라지지만, 권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함께 사는 지혜가 오래 가려면 결국 "베푸는 관용"에서 "누구나 가진 권리"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2. 이 이야기가 전하는 핵심 지혜
중세의 세 문명은 모두 다른 신앙의 이웃과 함께 사는 법을 찾아냈고, 그 덕분에 코르도바의 궁정과 장안의 거리, 톨레도의 회당 같은 놀라운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용이 권력자의 허락이나 보호에 기대고 있을 때는, 전쟁이나 재정난, 한 사람의 마음 변화만으로도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진짜 공존은 "참아 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웃이 나와 같은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받아들일 때, 함께 사는 지혜는 비로소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반도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다른 이웃"이 함께 만드는 물건 중 하나입니다. 최첨단 노광 장비는 네덜란드에서, 소재와 부품은 여러 나라에서, 설계와 생산은 또 다른 나라들에서 이루어집니다. 언어도, 문화도, 일하는 방식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칩을 완성하기 위해 협력합니다.
이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개인의 호의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지키는 "약속"입니다. 업계 단체가 정한 표준 규격, 계약과 품질 기준처럼 누가 어디에서 왔든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이 있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중세의 관용이 권력자의 마음에 따라 흔들렸던 것과 달리, 모두에게 같은 규칙이 있을 때 다양성은 위험이 아니라 힘이 됩니다. "보호"가 아니라 "같은 규칙 아래 같은 자리" — 오래 가는 협력의 조건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3. 오늘의 삶에 적용하기
우리 동네에도, 일터에도, 다른 나라에서 온 이웃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참아 주고" 있나요, 아니면 "같은 이웃"으로 대하고 있나요? 낯선 음식 계율이나 기도 시간, 명절을 신기하게 바라보기보다 한 번쯤 물어보고 존중하는 것 — 카이펑 사람들이 유대인 이웃을 이름 붙여 기억했듯, 작은 관심이 이웃을 이웃답게 만듭니다.
그리고 관용은 마음먹기만으로는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할 만합니다. 가정이든 모임이든 일터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과 약속을 세워 두는 것 — 그것이 내 기분이 좋을 때만 베푸는 친절보다 훨씬 든든한 공존의 바탕이 됩니다.
🎵 지혜와 함께 듣는 음악
이번 주부터 함께할 새 곡입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따뜻하게 어우러지는, 누군가를 집으로 맞아들이는 듯한 곡입니다. 코르도바 궁정에서 함께 책을 번역하던 학자들, 장안의 거리에 나란히 선 낯선 사원들, 톨레도의 회당을 짓던 장인들 — 서로 다른 신을 믿으면서도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간 이웃들을 떠올리며 들어보세요.
'Amberlight' by Scott Buckley – released under CC-BY 4.0. www.scottbuckley.com.au
💬 지혜의 숲 소통 공간
여기서부터는 이 글이 근거로 삼은 실제 자료와 이야기의 흐름을 정리한 부록입니다.
- 635년시리아 기독교 선교사 알로펜, 장안 도착당 태종이 이들의 교회를 인정했습니다
- 781년대진경교유행중국비 건립중국 기독교 150년의 역사를 한문과 시리아어로 새겼습니다
- 845년당 무종의 회창폐불사찰 4,600여 곳이 헐리고 승려 26만여 명이 환속했으며, 기독교·조로아스터교 성직자 3,000여 명도 쫓겨났습니다
- 10세기 중엽코르도바의 유대인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칼리프 압드 알라흐만 3세의 의사이자 외교를 맡은 실질적 외무 책임자였습니다
- 1012년 무렵카이로, 칼리프 알하킴의 예배당 파괴 명령유대교 회당과 교회가 헐렸다가, 1025~1040년 다음 칼리프 때 다시 세워졌습니다
- 1096년제1차 십자군과 라인란트 학살유럽에서 5천 명이 넘는 유대인이 희생되었습니다
- 1120년 무렵교황 칼릭스투스 2세의 「시쿠트 유다에이스」유대인에 대한 강제 개종과 폭력을 금지한 교서로, 이후 여러 교황이 다시 확인했습니다
- 1163년카이펑 유대인 회당 건립(1489년 비문 기록)송나라 시대 카이펑에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 잡았습니다
- 1180~1205년 무렵톨레도 회당(지금의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건립기독교 왕국에서 무슬림 장인이 유대인을 위해 지었습니다
- 1215년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유대인과 무슬림에게 구별되는 옷을 입도록 정했습니다
- 1290년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의 유대인 추방령1656년에야 다시 정착이 허용되었습니다
- 1492년스페인 알함브라 칙령개종하지 않은 유대인 4만~10만 명이 추방되었습니다
- 1856년오스만 제국 개혁 칙령무슬림과 비무슬림의 평등을 확인하고 지즈야를 폐지했습니다
이 글의 사실 관계가 실제로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하실 수 있는 1차 자료입니다.
이 편에서 다룬 세 문명의 "다른 신앙의 이웃"이 남긴 실제 흔적입니다.
나와 다른 믿음이나 문화를 가진 이웃과 가까워진 경험이 있으신가요?
처음엔 낯설었지만 알고 보니 따뜻했던 이웃, 함께 일하며 서로 배운 동료, 혹은 여행지에서 만난 뜻밖의 친절… 여러분의 "공존"의 기억을 댓글로 나누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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